그래도 ‘철강은 국력’… 벼랑끝서 고부가·현지화·저탄소 승부수
‘철강은 국력’이라는 구호가 상징하듯, 철강이 국가 경제의 중심이던 시대가 있었다. 1970년대 초창기 세대들은 경북 포항 영일만 황무지에서 쇳물을 뽑아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자본도, 기술도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필사적인 각오로 버텨냈다고 한다.이러한 과정 끝에 일궈낸 철강 산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소재들을 국산화하면서 원가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했고, 이는 조선 자동차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의 도약을 견인하는 동력이 됐다.철강 산업도 성장을 거듭했다. 현장 인력이 밤낮없이 설비를 연구하며 고유의 조업 기술을 축적했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밀리지 않는 경쟁력을 갖춰 나갔다. 특수강 등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품질을 보유하게 됐다.그러나 지금은 국내 철강 산업의 위상이 과거 같지 않다. 최근 수년간 복합적인 악재들로 ‘생존 위기’까지 거론될 처지다. 철강 산업을 키워낸 정부의 지원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삼중고에 둘러싸인 철강국내 철강업계는 ‘중국발 저가 공세’, ‘글로벌 보호무역 장벽’, ‘내수 부진’이라는 삼중고의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중국의 밀어내기 수출이다. 1996년 1억t으로 조강 생산량 세계 1위에 등극한 중국은 두 자릿수 경제 성장률에 힘입어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2020년 생산량이 10억7000만t에 달할 정도였다.그러나 부동산 경기 침체 등 자국 내 철강 수요가 줄어들면서 막대한 재고 물량을 헐값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중국의 철강 수출량은 2020년 5160만t에서 지난해 1억1900만t으로 배 이상 급증했다. 한국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602만t이었던 중국산 철강 수입량은 지난해 813만3644t으로 증가했다. 안방까지 침투한 중국산 저가 철강재 공세에 국내 철강사들은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대외 환경 역시 우호적이지 않다. 미국과 유럽(EU) 등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미국은 수입 철강에 50% 고율 관세를 적용 중이고, 유럽은 무관세 수입 쿼터를 현재의 절반으로 줄인 뒤 초과 물량에 50% 관세를 부과할 예정이다. 여기에 인도와 베트남 등 신흥국들까지 반덤핑 조치에 나서면서 국내 업체들의 수출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고금리와 부동산 경기 위축으로 인한 국내 건설 수요 부진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철근 총수요는 2021년 1100만t에서 지난해 666만t으로 쪼그라들었다. 올해도 건설·제조업 부진 영향으로 수요 회복이 제한적인 상황이다.이 같은 악재들이 겹치며 철강업계 수익성은 크게 악화했다. 철강업계의 척도로 통하는 조강생산량도 6223만t 수준으로 떨어졌다.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세아제강 등 국내 주요 철강사들의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모두 감소했다.국내 철강사 생존 방향은국내 철강사들의 생존 전략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해외 생산 기지 구축 등 현지화, 고부가가치 제품 양산 체계 마련 등 포트폴리오 다각화, 수소환원 제철과 전기로 중심의 저탄소 생산체제의 전환이다.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주 도너스빌 인근에 270만t을 생산할 수 있는 전기로 제철소 건설에 나섰다. 58억 달러(약 8조5000억원)를 투자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완공 후에는 현대차·기아의 미국 생산거점을 비롯해 북미 자동차 고객사에 고품질 자동차 강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포스코는 현대제철이 구축하는 미국 제철소에 20% 지분 투자를 통해 핵심 투자자로 참여한다. 포스코는 인도 1위 철강사 JSW스틸과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오디샤주에 연산 600만t 규모 일관제철소를 건설을 추진 중이다.수소환원 제철 기술 개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석탄 등 화학 연료 대신 수소를 써서 철을 생산하는 혁신 기술로, 철강 산업의 근본적인 탄소 감축을 위한 핵심 기술로 불린다. 포스코는 2030년 상용화 기술 개발을 목표로 최근 30만t 규모의 ‘하이렉스’ 실증 설비 착공에 돌입했다. 해당 공법이 완성될 경우 탄소 배출량은 기존 대비 약 2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이와 함께 철근, 형강 등 범용 제품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있다. 동국제강은 ‘디케이 그린바’와 ‘디-메가빔’를 내놨다. 디케이 그린바는 코일·내진·극저온 철근을 잇는 특수 철근 신제품으로 기존 철근 대비 부식이 없고, 강도가 높다. 디-메가빔은 규격 제한 없이 맞춤 생산이 가능한 제품인데,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용 강재로 각광받고 있다. 포스코는 에너지후판, 전력용전기강판, 기가스틸 등을 8대 핵심전략제품으로 선정하고, 제품별 프로젝트팀을 운영 중이다.철강업계 관계자는 18일 “과거 ‘더 많이, 더 싸게’로 경쟁하던 철강회사가 최악의 수요 부진과 원가 상승, 보호무역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차별화된 제품을, 효율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만드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국내 철강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K-스틸법)’ 시행까지는 한 달여 기간이 남았다.허경구 기자 nine@kmib.co.kr